2012년 9월 18일 화요일

미술사 Day2 :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클림트



유럽 여행을 간다면 제일 먼저 밟고 싶은 땅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축제에 가고 싶고 베토벤의 묘지에도 가보고 싶고 벨베데레 궁전에서 키스를 보고싶다.
미술사에서 오스트리아는 큰 영향력이 없지만 음악사에서는 베토벤모차르트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오스트리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피렌체에 메디치가 있엇다면 오스트리아에는 합스부르크. 로마 시대 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과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했고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결혼을 통해 전략적으로 영토를 늘려갔는데 전성기는 카를 5세 시절로 르네상스가 끝날 무렵, 프랑스보다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루터와의 갈등도 있었던 카를 5세는 말년에는 황제에서 물러나 수도원 생활을 하였다. 넓은 영토 중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는 지금의 스페인 지역을, 동생에게는 오스트리아 지역을 물려주었으나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루이 14세에 의해 망하게 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마리 앙투와네트. 프란츠 슈테판과 오스트리아의 국모로 추앙받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했다가 형장의 이슬이 된 바로 그녀이다. 대중적으로는 마리 앙투와네트가 유명하지만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시씨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 엘리자베트. 요제프 황제엘리자베트는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고 이 시대에 클림트요한 스트라우스가 활동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왈츠를 정책적으로 부흥시키는데 이때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의 활약으로 왈츠가 빈의 대표적 문화가 되고 클림트는 빈 분리파라는 미술사의 새로운 사조를 열게 된다. 구스타프 말러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며 문화의 부흥을 꾀한다.

클림트(1862~1918)는 금 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20세기 프로이드 심리학의 영향, 일본/중국 등 동양풍의 영향을 받아 어느 화가와도 차별적인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마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인물화에도 입체감이 없다. 인물화에는 풍경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고 풍경에는 사람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도 특징적이고, 그의 풍경화는 정사각형 프레임에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인물 뿐 아니라 풍경화에까지 장식적인 요소가 강조되어 고흐의 영향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을 말하자면 관능성과 장식성, 아르누보와 표현주의의 작가로 대표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역시나 풍경화.
19세기 빈의 주류 미술에 반대하는 클림트, 에곤 쉴레, 코코슈카 등이 활동한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을 외친다. 빈 분리파 전시관 이름이 Secession인줄 알았더니 분리파 그 자체를 의미하는 모양이다. 이제는 우리 시대에 맞는 그림을 그리자고 외치며 전사의 이미지인 아테네 여신을 상징으로 삼는다.
숱한 염문을 뿌린 클림트이지만 정작 결혼은 하지 않았다. 사망 당시 그의 자녀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14명이나 있었다고 하니 성적으로 매우 문란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순정도 있나보다. 클림트 동생 부인(우리나라 식으로는 제수씨)의 여동생인 에밀리 플뢰게와는 죽는 순간까지 곁에 머물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예술인들에겐 뮤즈가 있게 마련, 그녀가 뮤즈인가 싶다가도 그의 대표작인 ‘키스’의 여인이 에밀리 플뢰게다,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인 알마 말러다, 의견이 분분한 걸 보면 그냥 문란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유디트로 대표되는 팜므파탈을 나타내는 그림들을 보면 깨어 있는 사람인 것도 같다. 그 시대 여성은 이성이 없는 존재로 폄하되었는데 악녀든, 퇴폐적이든 본인의 이성에 따라 행동하고, 의도적으로 유혹하여, 도발하고 쟁취하는 자주적인 여성을 표현한 것이니.
‘키스'의 그 여인이 누구이든 간에 국외로는 나갈 수 없다는 그 그림을 내 눈으로 한 번 보고싶은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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